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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學硏究 - 傾蓋如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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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검 절약을 강조한 성리학의 나라 조선

글: 이윤석 역사연구가
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36)
꽃을 사치로 규정한 우리의 전통
왕이 경계할 대상에 놀이와 사냥은 물론 꽃도 포함돼
1970년대엔 허례허식 방지 명목 ‘결혼 꽃 제한법’도

젊은이들이 꽃놀이를 즐기러 떠나는 장면을 그린 신윤복의 '연소답청'. [중앙포토]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경조사에 가면 입구에 화환을 죽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지금은 경조사 때 자유롭게 화환을 진열할 수 있지만, 1973년 대통령령으로 ‘가정의례준칙’이 시행되던 시절에는 결혼식장에 화환을 두 개 이상 놓을 수 없었다. 신랑과 신부 및 그 부모와 주례 외에는 꽃을 달지 못 하게 하기도 했다. 만약 이를 어기면 벌금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법률 조항 같지만, 실제로 이런 규정이 국민 삶을 규제하던 시절이 그렇게 오래전이 아니다. 1994년에는 결혼식장에 진열할 수 있는 화환 숫자를 5개로 늘렸지만, 여전히 이 이상 화환을 진열하면 처벌 대상이었다. 가정의례준칙이 1999년 폐지된 이후 비로소 결혼식에서 화환을 제한하는 법령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 뒤에도 ‘건전가정의례준칙’이라는 법령이 제정돼 아직도 효력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한두 가지를 보면 아래와 같다.
제3장은 ‘혼례’에 관한 것으로 제8조에는 결혼식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써놓았다. 여기에는 구체적 하객 초청 범위와 접대 방식이 있다. “하객 초청은 친척·인척을 중심으로 하여 간소하게 한다”라고 했고 “혼인 예식을 마치고 치르는 잔치는 친척·인척을 중심으로 간소하게 한다”라고 돼 있다. 결혼식에 친·인척 외에는 초청하지 말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하객 상당수가 결혼 당사자와 그 부모의 친구나 동료들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다.
그리고 제5장은 제사에 관한 것인데, 제21조를 보면 “차례는 매년 명절의 아침에 맏손자의 가정에서 지낸다”라고 돼 있다. 한때 유행했던 호텔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 법령을 위반하는 셈이다. 또 제24조에는 “성묘는 각자의 편의대로 하되, 제수는 마련하지 아니하거나 간소하게 한다”라고 해 성묘할 때 제수를 준비하는 범위도 이 법령에서 정해 놓았다.
비록 허례허식을 없애고 낭비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결혼식장에 진열하는 화환 숫자를 정해 놓은 법령은 우스꽝스러운 것임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도 사치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비단옷을 금지한다든가 여성의 가체를 금지하는 일은 있었어도 꽃을 통제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꽃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능
각종 종교의식에서 꽃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찰이나 교회에서 꽃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이런 의미다. 무속에서도 화려한 꽃장식을 통해 신을 즐겁게 하려고 한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신라나 고려 때는 불교 행사에서 꽃을 많이 사용했다. 반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근검과 절약이 강조돼 전 시대에 비해 꽃을 쓰는 일이 줄었다.
조선 왕 중 특별히 꽃을 좋아한 임금은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전국의 좋은 모란을 모두 대궐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영산홍을 좋아해 대궐 뒷동산에 1만 그루를 심기도 했다. 철쭉이나 동백 등의 꽃나무를 모두 흙을 붙여 가져오라는 명령을 전국에 내려 이를 옮기던 백성이 지쳐 죽는 일까지 있었다.
연산군은 심지어 궁궐의 꽃과 과일나무를 관리하는 장원서의 관리들에게 좋은 화초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장원서 하인들이 서울의 민가에 진기한 화초나 과일이 있으면 그 집에 들어가 캐어 갔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진기한 꽃을 찾으러 다니는 장원서의 하인을 높은 사람을 접대하듯 했다고 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임금 자리에 앉은 중종은 꽃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철 따라 임금에게는 그 절기의 꽃을 바치는데, 중종 4년 가을 장원서에서 분에 심은 국화를 바치자 중종은 “꽃을 올리지 말라고 이미 분부했는데, 왜 이 꽃을 올리는가”라고 물었다. 신하가 각 철에 꽃은 바쳐도 괜찮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하자 중종은 “제철의 꽃이라도 바치지 말라”고 다시 명령했다.
그러나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 이런 꽃을 가까이 두고 즐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숙종은 대궐 뒷동산에 꽃을 심고 한가할 때 이를 감상하려고 했다. 어느 날 화분에 심은 석류 몇 분을 대궐 밖에서 가져와 후원에 심으려고 했는데, 때마침 감찰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관리 임원성이 이를 봤다. 그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대궐 밖에서 꽃을 들여갔다는 사실을 아는 외부의 사람들은, 이제부터 ‘우리 임금은 진귀한 꽃을 좋아한다’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해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석류 화분을 모두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십시오.”
숙종은 이 상소문을 보고 임원성을 칭찬하는 답신을 내려보냈지만, 석류를 돌려보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숙종 24년(1698)에 있었던 이 일을 통해 조선 후기에 꽃을 대하는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신하들은 임금이 꽃의 아름다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으므로, 이런 상소를 올리게 됐을 것이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조선 후기에 왕실을 비롯한 지배 계층에서는 사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강했다. 예로부터 왕이 조심해야 할 것으로 거론되는 노래와 여자, 놀이와 사냥, 좋은 건물, 꽃 등이 특히 경계 대상이었다.
이처럼 꽃은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왕실이나 민간에서 꽃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인들이 지은 수많은 꽃 관련 글이 있고, 19세기 대중이 즐긴 노래에도 꽃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문인들의 글이나 대중이 즐긴 노래에 등장하는 꽃은 자연 속의 꽃이지 가지를 꺾어 병에 꽂은 꽃은 아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축하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꽃을 꽂았고, 잔칫상이나 음식상에도 꽃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어사화도 꽃으로 장식한 것이다. 이처럼 각종 행사에서 많은 꽃을 사용했는데, 이런 꽃은 생화가 아니라 대부분 조화였다.
과거에도 값비쌌던 행사용 꽃
궁중 행사에서 사용하는 꽃이 모두 조화라는 사실은 조선시대 의궤(儀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일을 마친 후 그 전 과정을 그림과 함께 자세히 기록해 후대에 유사한 일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책을 의궤라고 한다. 여기에는 그 일의 내용, 참여한 인원, 소요된 예산, 사용한 물건 등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수천 권의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의궤의 한 예로 고종 39년(1902)에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마친 후 작성한 <진연의궤>를 보기로 한다. 여기에는 잔치 때 사용한 꽃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사용하는 꽃의 종류와 숫자, 그리고 꽃을 준비하는 부서와 가격 등을 적어 놓았다.
이 잔치를 위해 준비한 조화는 약 5만 가지다. 한 가지에 두세 송이부터 많게는 수십 송이 이상의 꽃과 잎이 붙어 있으므로, 꽃송이만 10만 개가 훨씬 넘는다. 꽃의 용도는 식사하는 음식상에 놓는 꽃, 손님 머리에 장식하는 꽃, 춤추는 사람이 장식하는 꽃 등 다양하다. 꽃 가격도 복숭아꽃 두 송이가 붙은 꽃 가지는 1전이고, 국화 세 송이가 달린 것은 1냥 2전으로 싼 것의 12배나 된다.
잔치에서 쓴 조화 중 가장 비싼 것은 준화(樽花)로, 이것은 한 쌍의 값이 200냥이다. 높이가 3m쯤 되는 나무를 커다란 항아리에 꽂고, 여기에 꽃과 함께 여러 가지 새와 곤충이 앉아있는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한 개의 제작비가 100냥이니 가장 싼 조화 가격의 1000배나 된다. 각종 조화를 만드는 재료는 주로 비단을 사용하지만, 밀랍으로 만들기도 했다.

궁중 행사에서 쓰던 가장 화려한 조화인 ‘준화’. [사진 진연의궤]


의궤에 나오는 꽃은 전부 조화로, 국가에는 조화를 만드는 장인이나 꽃바구니를 만드는 장인 등이 있었다. 조화를 많이 사용하는 곳은 불교 사찰을 들 수 있는데, 사찰 승려 중에는 조화를 만드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찰의 조화에는 비단이 아닌 종이를 썼다. 이는 경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행사가 끝나면 태우기 때문이다.
왕실 잔치에서 조화를 사용하는 풍습은 민간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잔치를 벌일 만한 지위나 재력이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잔치와 관련된 그림에서 꽃장식은 쉽게 볼 수 있다. 조화와 관련된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하나 보기로 한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정조 때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의 최고 관직을 모두 지낸 인물로, 조선시대 뛰어난 정승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영조 50년(1774) 4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평안도 관찰사 직책을 맡았던 적이 있다. 관찰사 임무 중 하나는 담당 지역을 순시해 각 고을 수령의 근무 성적을 매기는 일이다. 관찰사는 이를 위해 해당 고을을 직접 방문해 현황을 파악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상급 기관이나 감찰기관에서 감사를 위해 현장을 답사한다고 하면 해당 부서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채제공이 평안도 각 고을을 순시할 때도 각 고을에서 관찰사를 대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관찰사 순시 행렬이 강계에 갔을 때 일이다. 기생들이 음식상 올린 것을 보니 음식상 위에 아름다운 조화를 장식했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연꽃을 만들고 그 꽃 속에 어린아이 형상을 앉혀 놓은 모양이 매우 아름다워 그 자리를 빛나게 했다. 채제공은 강계 부사에게 “강계는 아주 외딴 지역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조화를 만드는 재주를 누가 익혔느냐”고 물었다.
꽃 장식 풍속 천히 여기기도
강계 부사는 “하인 중 조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음식상을 물릴 때 연꽃이 찢어지는 것을 염려한 채제공은 기생들에게 “연꽃이 찢어지지 않게 상은 치우고 꽃은 그대로 두라”고 말했다. 채제공이 이렇게 말한 것은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꽃이 찢어지면 조화를 만드느라 들인 공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압록강 근처 다섯 고을을 순시했는데, 가는 곳마다 이렇게 비단으로 만든 조화를 음식상에 올려놓았다. 강계의 연꽃처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고을에서도 비단으로 만든 붉은색과 녹색 꽃이 화려했다. 채제공은 평안도에는 음식상에 조화를 장식하는 풍속이 있는 줄 알고, 참으로 천박한 풍속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채제공이 의주에 도착해 음식상을 받아보니 여기에는 조화가 없었다. 그런데 의주 부윤이 “우리 고을에는 조화를 만드는 사람이 없어서 음식상에 꽃을 올리지 못했다”며 “관찰사께서 좋아하시는 꽃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채제공이 이상하게 생각해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강계에서 채제공이 연꽃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다는 소문이 각 고을에 알려져 평안도 모든 고을에서 조화를 준비해 접대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채제공은 깊이 느낀 바가 있어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남기면서 제목을 <안화설(案花說)>이라고 붙였다. ‘안화설’은 ‘음식상 위의 꽃에 관한 얘기’라는 의미다. 채제공이 이 일을 겪으면서 생각한 바는 “각 고을에서는 관찰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아내고, 이를 준비해 관찰사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 한 도의 관찰사가 이런 정도이니, 한 나라의 왕은 어떻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채제공이 조화 자체를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내용이 몇 가지 있다. 각 고을에 조화를 제작하는 장인이 있었다는 점, 조화는 주로 비단으로 만들었다는 점, 한 번 사용한 조화는 그대로 버린 것으로 보인다는 점, 채제공 같은 사람은 꽃을 장식하는 풍속을 천하게 여겼다는 점 등이다.
채제공의 글을 통해 조선 후기 각 고을에서 잔치할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음식상 위에 꽃장식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춘향전>에도 남원 부사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조화를 장식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면 19세기 지방 고을 수령들이 잔칫상에 꽃을 놓아두는 일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채제공이 음식상 위의 꽃장식을 천하다고 생각한 것은 조선시대 여러 임금이 자기는 꽃을 좋아하지않는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조선 초기 기록을 보면 태종은 “무거운 화분을 옮기느라 백성들이 고생하므로 꽃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세종은 궁중에서 기르는 화초와 비둘기를 모두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꽃을 관리하는 장원서에서 겨울에 영산홍을 화분에 심어 바치자 성종은 “겨울에 꽃이 핀 것은 사람이 억지로 한 것이고,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다시 꽃을 바치지 말라”고 말했다. 성종은 겨울에 온실에서 인위적으로 꽃나무에 꽃을 피우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왕이나 고위 관리가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로 꽃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꽃의 화려함을 경계하겠다는 위정자로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 임금도 자기는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봄이면 인왕산 아래에 있는 할머니 사당을 참배하고 신하들과 함께 근처 경치 좋은 곳에서 꽃을 구경했다.

조선 왕 중 특별히 꽃을 좋아한 임금은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심지어 궁궐의 꽃과 과일나무를 관리하는 장원서의 관리들에게 좋은 화초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진은 2025년 10월 10일 서울 창경궁 대온실에서 열린 전통 화훼 문화를 소개하는 ‘동궐 장원서’ 행사 모습. [연합뉴스]


화려함 경계한 위정자의 의지
화분의 꽃이나 화려한 조화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는 서민들이라고 해서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민의 꽃구경은 집안 뜰이나 장독대에 화초를 심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테지만, 노래나 그림을 통해서도 즐길 수 있다. 현재의 대중가요라고 할 수 있는 시조에는 다양한 꽃이 등장한다. 서울의 그림 파는 가게에서는 꽃이 들어있는 여러 가지 그림을 판매했다.
19세기 서울 풍물을 그린 <한양가>라는 작품에는 그림 가게에서 파는 많은 종류의 그림을 나열했다. 이런 그림은 대부분 집안 벽이나 문에 붙이는 장식용인데, 그 그림에는 대부분 꽃이 들어 있다. 순전히 꽃만 그린 그림도 많았다. 특히 벽장문에 붙이는 그림은 사군자라고 하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것이었다.
집안에 꽃 그림을 걸어두고 뜰에 약간의 화초를 심어 꽃을 즐기는 것 외에도 봄이면 꽃피는 산이나 들로 나가 꽃구경을 했다. 시간이나 금전적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서민들도 1년에 한 번은 꽃구경하러 밖으로 나갔다.
서울 남산에서 보는 시내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운데, 특히 봄에 꽃과 버들이 만발한 경치를 보는 것은 예로부터 유명해 서울의 열 가지 경치 중 하나였다. 각 지방에서도 봄이면 부녀자들이 음식을 먹으며 봄의 경치를 즐기는 화전놀이를 했다. 이것도 꽃놀이 중 하나라고 하겠다.
농촌진흥청 통계에 따르면 근래 우리나라 화훼산업의 연간 총생산액은 약 5300억원 정도인데, 이전에 비해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시기 일본의 약 3조5000억원, 중국의 약 90조원에 비하면 인구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꽃을 사치와 연관시켜 온 우리 문화가 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한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규모 꽃 축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철마다 공원이나 거리를 다른 꽃으로 장식하고 있다. 고급 음식점만이 아닌 대중음식점도 식탁 위에 꽃을 놓아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꽃을 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국가가 꽃을 사치로 규정한 오랜 전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윤석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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