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진치역사관(嗔痴歷史官)
강희50년(1711년), 육월 초사흘, 북경 자금성. 내무부의 예산내역보고서가 강희제의 어안(御案)에 올라왔다; 황제가 7일후 승덕(承德)이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출발하고, 예상일정은 10일이었는데, 그 일정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은 합계 백은 8만6천냥이었다. 이 숫자는 젊은 호부주사(戶部主事) 진정경(陳廷敬)이 마음 속으로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다. 그는 조용히 계산을 해보았다: 북경에서 승덕까지의 거리는 약 200킬로미터로 빠른 말을 타고 가면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느 거리이다. 그런데 왜 황제의 행차에는 십일이나 걸리는 것일까? 그리고 그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비용명세에 포함되어 있는 "다리수리, 도로보수 은5천냥", "연도의 우물물정화비용 은8백냥", 심지어 "짐승을 쫓는 호위 은3백냥"도 있었다. 그날 저녁, 진정경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성가(聖駕, 황제)의 출순(出巡)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백리의 길을 순일(旬日, 십일)이나 걸려서 가고, 비용이 수만이라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남겨놓은 일기는 부지불식간에 청나라제왕의 출순과 관련한 복잡한 진상을 드러냈다. 우리는 강희제의 발걸음을 따라 이 "어도(御道)"를 다시 걸어보면,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절대로 단순한 피서여행이 아니다. 정밀하게 조직된 정치쇼이고, 군사검열이며, 민족외교이다.
어가출순의 방대한 규모
200킬로미터의 거래를 왜 10일이나 걸려서 가야하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인원규모가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청성조실록> 및 내무부자료의 기재에 따르면, 강희제의 중후기 승덕으로 갈 때의 전형적인 수행진용은 다음과 같다:
핵심인원(약1,200명)
황제 및 후궁비빈, 황자,황손: 50-80명
내각대학사, 6부상서등 중추관료: 30-40명
어전시위, 건청문시위: 200명
태감, 궁녀: 400명
태의(太醫), 선방(膳房), 차방(茶房)등 후방인원: 300명
호위군대(약3,000명)
전봉영(前鋒營): 500명(길을 열고, 정찰한다)
호군영(護軍營): 1,000명(핵심호위)
효기영(驍騎營): 800명(기동호위)
화기영(火器營): 300명(특수장비)
보군영(步軍營): 400명(후방보위)
운수인원(약2,000명)
마필: 어용마 300필, 관병용마 2,500필, 짐싣는말 800필
차량: 어용대거(大車) 80량, 짐수레 200량, 양초(糧草)수레 150량
가마: 어교(御轎) 8승, 비빈교 20승, 관원교 100승
총규모는 6,000명의 인원, 3,000여필의 말, 500여량의 수레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이다. 여기에는 연도에서 황제를 맞이하는 지방관리, 현지주둔부대와 민부(民夫)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규모의 인원이 이동하려면 당연히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건 그저 표면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어도의 비밀
강희제가 승덕으로 갈 때 지나는 길은 보통의 도로가 아니다. 전용의 "어도"이다. 이 도로의 건설과 유지관리기준은 일반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넘어선다.
도로규격
너비: 주간도로의 너비는 3장(약10미터), 6량의 마차가 나란히 통행할 수 있다.
노면: 황토로 채우고, 위에는 가는 모래를 덮는다. 비가 온 후에는 즉시 수리한다.
기울기: 최대 기울기는 5%를 넘지 않는다. 산이 나타나면 길을 닦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
이정표: 매5리마다 청석비를 세운다. 비에는 이정(里程)과 다음번 역의 정보를 새긴다.
연도시설
(1) 행궁(行宮): 모두 7개의 고정행궁을 건설했는데, 행궁간의 거리는 30-40리(15-20킬로미터)이다.
남석조행궁(南石槽行宮): 북경을 나와 첫번째 머무는 곳
밀운현행궁(密雲縣行宮)
나가교행궁(羅家橋行宮)
요정행궁(瑤亭行宮)
파극십영행궁(巴克什營行宮): 고북구를 나서서 있음.
양간방행궁(兩間房行宮)
안자령행궁(鞍子嶺行宮)
(2) 첨영(尖營): 행궁과 행궁의 사이에 임시휴식장소를 설치한다. 낮에 중간에 휴식하는데 사용하며, 간이한 건물과 차와 물을 공급한다.
(3) 우물: 매 10리마다 반드시 우물을 설치한다. 전문인원이 검사하고 정화한다. 이들 시설이 의미하는 것은 황제가 움직일 때는 "아무 곳이나 가고 아무 곳에서나 거처한다"는 식이 아니라, 반드시 엄격하게 미리 예정된 노선으로 행진하고 주둔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매일의 행정은 약 30-40리(15-20킬로미터)이고, 바로 행궁과 행궁 사이의 거리와 같다.
하루의 행정(行程)
강희제이 출순때 전형적인 하루의 일정을 살펴보자:
인시(寅時)(새벽4시)
황제는 행궁에서 기상하고, 세수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어선방에서는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통상적으로 간소하다. 좁쌀죽(小米粥), 떡(餑餑), 4개의 소채(小菜); 관리들은 행궁의 바깥에 줄을 서서 대기한다.
묘시(卯時)(새벽5시)
아침식사(早膳)후, 강희제는 긴급한 상소문을 처리한다(연도에 역참이 있어 전달받는다) 현지관리를 불러서 보고를 듣는다. 당일의 행진순서와 호위배치를 확정한다.
진시(辰時)(오전7시)
어가가 출발한다. 순서는 엄격하다.
(1) 전봉영(前鋒營)이 길을 연다(반시진 전에 미리 출발한다)
(2) 노부의장(鹵簿儀仗): 기(旗), 산(傘), 선(扇), 장(杖)등.
(3) 어전시위가 어교(御轎)가 출발한다
(4) 후궁의 가마가 출발한다.
(5) 문무백관이 출발한다.
(6) 호군영이 후방을 맡는다.
행군속도: 시간당5-6리(2.5 내지 3킬로미터)
오시(午時) 오전11시
첨영에 도착하여 휴식한다. 점심(午膳)식사를 한다. ㅌ오상적으로 사전에 준비한 떡, 장육(醬肉)으로 간단하게 한다. 1시진(2시간) 휴식을 취한다.
미시(未時) 오후1시
계속 진행한다.
신시(申時) 오후3시-5시
다음 행궁에 도착한다.황제는 행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관리들은 각자 거소로 배치된다. 호위부대는 군영을 만들고 경계를 세운다.
유시(酉時) 오후5시-7시
저녁식사(晩膳) 점심식사보다 풍성하다. 연도의 지방관리를 불러서 민정(民情)을 이해한다. 당일 송달된 상소문을 비열(批閱)한다.
술시(戌時) 오후7시-9시
자유시간. 강희제는 통상적으로 책을 읽고, 시를 짓거나 혹은 대신들과 학문을 논했다. 강희제는 <행궁야독(行宮夜讀)>이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누영촉화명(漏永燭花明), 서위정유성(書幃靜有聲), 산심야기청(山深夜氣淸), 유문송풍향(惟聞松風響)"
해시(亥時) 저녁 9시
취침. 시위는 순라를 강화한다. 이런 흐름으로 매일 실제 행진하는 시간은 약 4-5시간이고, 행진거리는 30-40리이다. 이는 체력을 고려한 것일 뿐아니라, 정치적인 필요도 고려한 것이다.
황제와 백성의 근거리접촉
강희제가 승덕으로 출순하는 중요한 목적중 하나는 '근정애민(勤政愛民)'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도중에 신경써서 여러 차례의 '친민(親民)'활동을 안배한다. 밀운(密雲), 회유(懷柔)등지에서 강희제는 항상 현지의 연장자와 향신(鄕紳)을 불러, 농사, 세금, 민생을 물었다. 그리고 견백(絹帛), 은량등을 하사하고, 현지의 일부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이 장면은 관방사서에 기록되었고, '성군휼민(聖君恤民)의 이미지를 전파했다. 조백하(潮白河), 난하(灤河)등 수역을 지날 때, 강희제는 수레를 멈추고 제방을 시찰하곤 했다. 강희46년(1707년)의 출순때, 그는 직접 밀운구간의 제방을 강화하도록 지시했으며, 3천냥의 자금을 특별히 내려보낸다. 이는 실제문제를 해결할 뿐아니라, 황제가 수리를 중시하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북구(古北口)를 나서면, 강희제가 현지에 주둔하는 팔기군을 검열했다. 고북구는 장성의 중요한 관문이고, 많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검열은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격려하는 것이기도 했다. 거의 매번 출순할 때마다, 연도 주,현의 일부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다. 강희48년(1709년)의 출순때, "밀운, 회유, 순의 3개현의 당해년도 세금 3분의 1을 감면"해주었다. 이런 정치적 투자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런 활동에도 시간이 필요하고 조직이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일정이 늦추어지는 것이다.
승덕의 진정한 사명
많은 사람들은 승덕 피서산장이 단지 황제의 "여름궁전"이라고 오해한다. 실제로 그곳은 더욱 중요한 정치적 공능을 가지고 있었다. 강희제가 피서산장을 건립한 중요한 목적은 가까운 거리에서 "목란추선(木蘭秋獮, 가을사냥)"을 지휘하는 것이다. 매년 가을이 되면 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대규모의 수렵활동을 벌인다. 이는 본질적으로 군사연습이고, 팔기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며 몽골의 각부족에 위세를 보이는 것이었다. 강희제, 건륭제는 항상 피서산장에서 몽골왕공, 티벳라마, 위구르귀족을 접견했다. 만수원몽골빠오(萬樹園蒙古包), 외팔묘(外八廟)등의 시설은 모두 민족교류를 위해 건설한 것이다. 여기에서 연회, 사연(賜宴), 봉상(封賞)이 거행되었고, 청왕조의 여러 민족간의 유대를 잇는 중요한 행사였다. 승덕의 위치는 북경과 몽골의 사이에 있다. 그리하여 몽골, 러시아등 북방사무를 처리하기 편했다. 강희제는 이곳에서 러시아사신을 접견하고, <네르친스크조약>체결이후의 일에 대해 이곳에서 상의하였다. 그러므로, 승덕으로 가는 여정은 실제로 정치의 중심을 민족변방으로 옮기는 의식적인 이동이었다. 천천히 가야만 황제의 위엄과 은덕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시기의 행정변화
강희제때의 승덕행은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초기(강희16년-30년, 1677-1691)
행정이 비교적 간소했고, 수행인원도 적었다.
도중에 장봉(帳篷)을 세우고 노숙했으며, 고정적인 행궁은 없었다.
시간: 8-10일이 소요되었다.
특징: 현지시찰을 중시했고, 자주 노선을 바꾸어 지형을 관찰했다.
중기(강희31년-50년, 1692-1711년)
행궁체계가 완비되고, 행정이 고정된다.
규모가 방대하고, 의식이 번잡했다.
시간: 10-12일
특징: 정치쇼의 색채가 농후했다.
말기(강희50년이후, 1711-1722)
신체적인 원인으로 행정이 느려진다.
더 많은 시간을 행궁에서 휴식한다.
시간: 12일-15일
특징: 휴양을 중시했고, 정무처리비중이 늘어났다. 건륭제시기 이 길은 더욱 느리게 갔다. 건륭제의 행정은 15일-20일로 늘어난다. 그리고 더 많은 오락활동과 연도유람이 추가되었다. 그는 심지어 이 어도를 를위해 수십수의 시가도 지어, 상세히 매 행궁, 매 풍경을 묘사했다.
여정의 댓가
이런 규모의 출순은 비용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강희49년(1710년)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직접비용지출:
내무부예산: 8.6만냥백은
지방부담(도로수리, 공급): 약5만냥
연도상사(賞賜): 약2만냥
합계:약15.6만냥(당시 3천명 지현(知縣)의 1년치 녹봉에 상당함)
간접비용
연도의 주현은 3개월전부터 준비작업을 해야 한다. 백성들은 요역에 나서 도로를 수리하고, 물자를 공급한다. 농작물은 이들 인원이 지나가면서 짓밟힌다. 지방관리들의 접대압력이 거대했다. 비록 강희제가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백성을 괴롭히지 말도록' 요구했지만, 이처럼 방대한 인원이 지나가면 민생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옹정제는 즉위후에 이런 비용을 감안하여 승덕으로 가는 횟수를 대폭 감소시킨다. 그러나 건륭제는 다시 번잡한 의식을 회복시킨다.
현대의 시각에서의 반성
오늘날, 북경에서 승덕까지, 고속철로 1시간이면 도착한다. 자가용을 운전하면 2-3시간 걸린다. 우리는 강희제때 이 길을 가는데 10일이나 걸렸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10일의 의미는 '여행'을 넘어선다.
권력을 드러낸다: 황제의 출행 자체는 통치권위의 체현이다.
정치의 연속이다: 조정의 권위를 변방지역까지 확장한다.
민족의 유대이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을 연결시킨다.
군사의 검열이다: 무력적인 위하력을 유지한다.
강희제는 <피서산장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짐은 매년 가을사냥을 하는데, 그저 놀고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실은 몽골을 다독이고 병졸을 훈련시키기 위함이다." 이 말이 본질을 꿰뚫고 있다. 승덕행은 단순한 피서휴가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고속도로의 주변의 어느 산자락에서 아마도 옛 어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레바퀴가 무수히 지나갔던 황토는 황제의 여정을 증명해줄 뿐 아니라, 제국이 변방을 다스리는 지혜, 여러민족간의 통일을 유지하는 노력, 그리고 전통중국정치에서의 의식, 권력, 실무가 교묘히 융합된 독특한 논리를 볼 수 있다. 200킬로미터, 10일의 시간, 느린 것은 말발굽이 아니라, 방대한 제국이 정밀하게 운용되는 리듬이다; 비용소모는 은량만이 아니라, 천하의 안정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투자이다. 이것이 아마도 강희제의 마음 속에서의 계산이었을 것이다. 정치적인 이득이 경제적인 손실보다 영원히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강희제의 피서산장행: 북경에서 승덕까지 200킬로미터의 거리를 왜 10일이나 걸려서 갔을까?
글: 진치역사관(嗔痴歷史官)강희50년(1711년), 육월 초사흘, 북경 자금성. 내무부의 예산내역보고서가 강희제의 어안(御案)에 올라왔다; 황제가 7일후 승덕(承德)이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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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찬 논설위원
경향신문 후마니타스 인문기행 ‘열하일기’ 2차 답사
지난달 27일 중국 하북성 승덕(承德)시 열하문묘 앞 마당에서 이승수 한양대교수(왼쪽에서 네번째)가 경향신문 열하일기 답사 참가자들에게 연암 박지원의 열하 방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 열하문묘는 문화대혁명 때 소실됐으며 2010년 복원됐다. 문묘 왼쪽에 연암이 묵었던 태학관이 있다. 후마니타스연구소 제공
지난달 27일 중국 하북성 승덕(承德)시 열하문묘 앞 마당에서 이승수 한양대교수(왼쪽에서 네번째)가 경향신문 열하일기 답사 참가자들에게 연암 박지원의 열하 방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 열하문묘는 문화대혁명 때 소실됐으며 2010년 복원됐다. 문묘 왼쪽에 연암이 묵었던 태학관이 있다. 후마니타스연구소 제공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의 열하일기 답사팀이 지난달 24~28일 연암 박지원과 함께 걸었다.
‘열하일기’ 속 ‘동악묘기’ ‘황도기략’ 등 연암의 서술 따라 ‘통주~승덕’ 기행
“짐승 같은 산과 귀신 같은 산봉우리들이 창과 방패를 벌여놓은 듯” 험난함 묘사한 고북구
명문장 ‘야출고북구기’ 낳은 만리장성 3대 관문…답사팀엔 단풍 물든 평온한 산촌
지난 6월 1차(압록강~심양~산해관~통주)에 이은 두 번째 연행길 답사였다. 2차 답사는 북경의 초입 통주(通州)에서부터 시작됐다. 북경과 항주를 잇는 중국 대운하의 기착점인 통주는 남방의 물산이 몰렸던 물류기지였다. 230여년 전 연암은 빽빽이 들어찬 배들을 본 뒤 “운하의 선박들을 구경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수도의 장관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옛 운하 물길에는 배 한 척 다니지 않는다. 답사팀은 강변을 걸으며 화려했던 통주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통주에서 북경성 방향으로 8리 지점에 팔리촌이 있다. 청나라 옹정제는 팔리촌에서 북경까지 40리길에 석도(石道)를 닦았다. 곡식 운송 대로였다. 그 시작이 영통교(永通橋)다. ‘팔리교’라고도 하는 이 다리는 노구교(蘆溝橋), 조종교(朝宗橋)와 함께 북경 3대 석교로 꼽힌다. 1446년에 건설된 영통교 양쪽 난간에 수 십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돼 있다. 다양한 얼굴의 조각상은 마모가 심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리 양단의 아래에도 엎드린 사자 두 마리가 있다. 운하의 홍수를 막는 진수수(鎭水獸)이다.
다음 방문지는 동악묘이다. 중국 5악의 하나인 태산의 신을 모신 도교 사당이다. 6만㎡의 넓은 경내에 북경 민속박물관이 있다. 연암 연행단의 삼사, 곧 정사·부사·서장관이 황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옷을 갈아입었던 곳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 ‘동악묘기’를 남겼다. 답사팀도 연암처럼 경내를 어슬렁댔다. 입구의 800년 된 회화나무는 사당의 산증인이다. 동악태제를 비롯해 ‘동악묘기’에 묘사된 여러 신상과 비석들은 옛 모습 그대로다. 동악묘를 나오니 가을 해가 기울고 있었다. 동악묘 맞은 편에 ‘永延帝祚’(영연제조)라는 글자를 새긴 유리 패루가 눈에 들어온다. 좌우에는 고루와 종루가 우뚝하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은 북경에서만 한달간 체류했다. 자금성 서쪽의 서단 인근에 있던 서관(西館)을 숙소로 사용했다. 앞서 연행사들이 주로 묵은 숙소는 옥하관(玉河館)이었다. 그러나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사신의 숙소가 되면서 조선 사신들은 회동관으로 밀려났다. 연암이 가기 한 해 전 회동관이 불탔다. 연암 이후에는 서관을 주로 사용했다. 답사팀은 아침 일찍 옥하관을 찾아갔다. 답사팀을 이끈 이승수 한양대 교수가 앞장섰다. 회동관이 있었다는 왕부정의 금어호동(金魚胡同)을 거쳐 천주교 동당을 들렀다. 이어 옥하관으로 가는 동교민항(東交民巷)은 사신들의 거리다. 명청시대에는 사관(使館)들이, 20세기 초에는 대사관들이 모여있었다. 옥하관이 있던 곳에는 중국 최고인민법원이 들어섰다. 경비가 삼엄해 입장은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이승수 교수는 “‘옥하’는 한국 문헌에만 등장하고 중국 자료에는 ‘어하(御河)’로 나온다”고 옥하관의 명칭을 설명했다. 어하에 3개의 다리가 있었다는데, 지금 어하는 물론 어하교도 없다. 하천을 메워 도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의로(正義路)’가 그것이다. ‘정의로’ 입구에 안내판이 있다. “전체 길이는 730m이다. 동쪽 장안가 남쪽의 정의로의 본래 이름은 어하교이다. 어하의 옛 길이다….” 북경에 남아있는 옥하관에 대한 유일한 표지이다.
황제의 피서산장 호출…연암은 하룻밤에 9개의 강을 건넜을까
옥하관에 비하면 유리창 거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점가로 이름 높은 관광 명소다. 거리 이름은 황궁에 납품하던 유리기와를 만든 곳에서 유래했다. 연암이 이곳을 놓칠 리 없다. 그는 유리창의 양매서가를 거닐고 ‘육일루’, ‘선월루’ 서점을 찾았다. 연암은 유리창의 건물이 27만 칸이었다고 <열하일기>에 적었다. 이승수 교수는 유리창은 선진 문물의 수입 창구였을 뿐 아니라 한·중 지식인의 ‘만리신교(萬里神交)’의 장, 곧 만남의 장소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청나라 말, 이곳의 서점은 270여개나 됐다. 지금 서점은 거의 없고 골동품 가게가 대부분이다. 서울 인사동의 변천과 비슷하다. 평일이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연암에게 북경은 ‘호기심 천국’이었다. 이곳저곳을 쏘다녔고, 중국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열하일기>의 ‘황도기략’은 유리창, 자금성, 천단, 종묘와 사직 등 북경 문화유산에 대한 기록이다. 북경 최고의 천주교회인 천주교 남당도 중요한 사적이다. 연암은 이곳 성당의 그림·악기 등에 관심을 보였다. 이 성당은 1605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개인 예배당에서 비롯됐다. 소현세자와 친교가 두터웠던 아담 샬(중국명 탕약망)이 와서는 본격 교회 건물로 증축했다. 1650년의 일이다. 이곳은 연행사들의 필수 코스였다. 김창업, 홍대용도 이곳을 찾았다. 성당 입구에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와 마테오 리치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교회당은 바로크식 건물로 아치형의 출입문이 인상적이었다. 성당 문이 닫혀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한 답사팀은 성당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 방문은 돌발적으로 이뤄졌다. 연암 일행은 당초 북경에서 건륭제의 만수절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다. 열하로 오라는 통보를 받고, 연암 일행은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북경에서 열하, 곧 승덕까지 230㎞를 4박5일에 걸쳐 주파한다. 밤잠도 이루지 못한 채 산과 강을 지나고 장성을 넘었다. 이 속에서 ‘일하구도하기’와 ‘야출고북구기’라는 명문장이 나왔다.
연암은 하룻밤에 아홉 개의 강을 건넜을까. 이승수 교수는 백하, 조하, 난하가 이어지고 구불구불 산들이 계속되는 지형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면서도 픽션이 가미된 산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밝혔다. 여행길에 ‘호질’과 같은 소설을 뚝딱 지어내는 그의 상상력으로 볼 때 개연성이 있는 얘기다. 북경~열하 노정에서 떨어진 북경시 회유구에 있는 ‘구도하(九渡河)’에서 착상해 ‘일야구도하기’를 썼을 수도 있다. 열하 가는 옛 길은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북경 사람들의 식수원인 밀운저수지가 들어선 뒤에는 노정을 추적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야출고북구기’의 현장 고북구는 관광 명소다. 고북구는 산해관, 거용관과 함께 북경에서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만리장성 3대 관문 가운데 하나이다. 명대 이전에는 북방유목민족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였지만, 청나라 강희제 이후에는 피서산장으로 통하는 행차길로 사용됐다. 지금은 황제가 다녔다는 고어도(古御道)와 크고 작은 사원들을 복원해 관광객을 부른다. 답사팀은 고어도와 고북구 장성길을 걸었다. 연암은 “짐승 같은 산과 귀신 같은 산봉우리들이 창과 방패를 벌여놓은 듯하다”고 고북구의 험난함을 묘사했지만, 답사팀이 걸은 고북구는 단풍이 물든 평온한 산촌이었다. 내친김에 고북구를 끼고 있는 반룡장성에 올랐다. 구불구불 용이 서려있다는 반룡장성은 장관이었다. 잘 다듬어진 팔달령장성과 달리 폐허의 장성에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북경에서 보기 어려운 파란 하늘은 답사팀을 더욱 설레게 했다.
황제의 여름별장 있는 열하에서 연암은 승려·사신·학자들 만나며 동아시아를 조망
그 배경인 문묘·태학관,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호텔로도 임대…당시의 풍취 사라져
황제의 피서산장 호출…연암은 하룻밤에 9개의 강을 건넜을까
열하는 황제의 여름별장 피서산장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연암에게 피서산장의 풍광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열하의 건륭제 생일잔치에 참여한 승려, 사신, 학자들을 주목하며 동아시아 세계를 조망했다. 열하는 세계의 형세를 살피는 심세(審勢)의 현장이었다. 그는 생각의 일단을 <열하일기> ‘심세편’에 담았다. 답사팀 역시 연암의 시각을 주목했다. 연암이 열하 체류 동안 숙소로 이용했던 태학관을 먼저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태학관은 공자 문묘에 부속된 성균관을 말한다. 유생들의 학교이자 기숙사이니 연암의 숙소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 학자들을 만나 인생과 자연과 철학을 논했다. 중국 3대 문묘의 하나인 열하 문묘는 문화대혁명 때 소실됐다가 2010년에 복원됐다.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문묘는 썰렁했다. 새로 세운 콘크리트 시설에서 연암의 체취를 맡기는 어려웠다. 성균관으로 복원된 태학관은 호텔로 임대해 줄 정도로 관리가 엉망이었다. 연암이 달빛 아래 담배 물고 거닐었던 풍취는 어디에도 없다. 중국 문화의 현주소다.
승덕 피서산장 앞 시민공원에 세워진 박지원기념비. 박지원의 성을 ‘樸’으로 잘못 적었다(위 사진). 열하일기 답사 참가자들이 지난달 26일 고북구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옛 황제의 행차길인 고어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후마니타스연구소 제공
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세계문화유산 피서산장을 한 시간 동안 걸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피서산장 안에 박지원과 이덕무의 기념비가 있었다는데 비석이 놓였던 자리는 텅 비어있다. 아쉬워하던 차에 피서산장 밖 시민공원에서 박지원 기념비를 만났다. 그런데 아뿔싸! 박지원의 성 ‘朴’이 ‘樸’으로 되어있다. 중국에 없는 ‘박’씨를 번체자로 쓰면서 빚어진 오류다.
피서산장 밖에 있는 수미복수지묘는 건륭제의 초청을 받아 방문한 티베트 불교 제2인자 판첸라마가 한달 넘게 거처했던 찰십륜포(札什倫布)이다. 연암은 이곳에서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만남을 지켜보며 청의 외교정책을 들여다봤다. 관찰 결과가 <열하일기>에 있는 ‘찰십륜포’, ‘반선시말’, ‘황교문답’이다. 이 글들은 오늘날에도 국제정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텍스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아시아는 소리 없는 전쟁터이다. 연암은 보이지 않는 외교전쟁을 읽어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연암의 ‘심세’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황금 기와지붕이 이채로운 수미복수지묘를 거닐면서 연암의 통찰력의 근원을 생각했다. 경향신문 열하일기 답사팀의 여행은 열하 외곽, 경추봉에서 끝났다. 야구방망이를 닮았대서 ‘방추봉’이라고도 불리는 경추봉에 오르니 피서산장과 승덕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열하를 해자로 삼고, 소포탈라궁(보타종승지묘)과 수미복수지묘를 유목 민족을 회유하는 사찰로 배치한 피서산장은 별장이지만 기실 정치적 공간이다. 연암은 경추봉에 오르지 않고도 이를 간파했다.
답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참가자들은 4박5일의 소회를 얘기했다. 장소가 시간을 호출한다고 했던가. 답사에 참여한 30명은 모두 200여 년 전 연암을 만나 함께 걷고 대화했다. 연암은 우리 역사의 큰 바위 얼굴이었다. 연암을 만나게 한 가이드북은 <열하일기>였다. 참가자들은 여행을 통해 연암 박지원이라는 거인을 마음속에 품었다. 북경 공항에 도착했을 때야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승수 교수가 한마디를 던졌다. “말은 다 했으나 생각은 끝이 없을 것이다(言有盡而意無極也).” 열하답사는 늦가을날의 몽유(夢遊)였다. (※지명·인명 표기는 현지 중국어 발음이 아닌 한자음을 따랐다.)
황제의 피서산장 호출…연암은 하룻밤에 9개의 강을 건넜을까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의 열하일기 답사팀이 지난달 24~28일 연암 박지원과 함께 걸었다. 지난 6월 1차(압록강~심양~산해관~통주)에 이은 두 번째 연행길 답사였다. 2차 답사는 북경의 초입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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