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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 카라바조는 왜 목 잘린 자화상을 그렸을까 [슬기로운 미술여행] - 매일경제

[슬기로운 미술여행-1]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과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로마 여행에서 놓치면 아쉬운 곳으로는 보르게세 미술관이 있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베르니니와 카라바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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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조각 천재들이 만든 트레비 분수. 다만 지금은 ‘공사중’입니다. ⓒ김슬기

 

[슬기로운 미술여행-1]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과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로마 여행에서 놓치면 아쉬운 곳으로는 보르게세 미술관이 있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베르니니와 카라바조의 컬렉션이 유명합니다.

베르니니와 카라바조는 바티칸의 두 거장 만큼이나 로마를 대표하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우연하게도 카라바조를 끊임없이 만나고 있습니다. 5월 로마 출장을 앞두고 넷플릭스의 걸작 <리플리>를 본 덕분에 이 거장의 이야기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살인자, 도망자, 불멸의 천재 이야기를 만나보시죠.

트레비 분수에 남아 있는 거장 베르니니의 흔적

트레비 분수는 단순한 분수가 아닌 바로크 예술의 걸작입니다. 역사적 의미도 있습니다. 2000년전 로마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상수도입니다. 수로를 건설해 깨끗한 물을 시민 모두가 마실 수 있게 했습니다.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수로의 종착지에 만든 분수가 트레비 분수입니다.

1629년, 교황 우르반 8세는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1598~ 1680)에게 분수의 디자인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교황이 서거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니콜라 살비가 스승 베르니니의 설계를 모방해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명으로 분수의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주세페 파니니가 18세기에 완공했죠.

분수를 내려다보는 조각은 그리스 신화 속 물의 신 오케아노스를 중앙에, 그 옆에는 바다의 신 트리톤과 말을 장엄하게 묘사했습니다. 2세기에 걸쳐 완성된 이 분수는 베르니니의 바로크 미학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그가 실제로 남긴 분수는 나보나 광장의 피우미 분수가 있습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속 장면으로 기억되는 곳이라,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너무 옛날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요즘에는 넷플릭스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나온 동전 던지기 장면으로 더 익숙하겠죠. 성수기에는 정말 미친듯한 인파가 몰려들어서 영화 속 같은 한적한 모습을 보는 건 말그대로 ‘판타지’입니다. 게다가 10월에 찾은 이 곳은 역시나 동전 제거와 보수를 위해 가동이 중단되고 있었습니다. 5월에 미리 만나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의 보석, 보르게세 미술관
대저택을 미술관으로 만든 보르게세 미술관. ⓒVatican Museums

 

보르게세 공원 안에 있는 아담한 보르게세 미술관 주변은 시끌벅적한 로마 도심과 달리 한적하고 산책을 하기도 좋습니다. 안전을 이유로 2시간당 360명의 입장만 허용해, 여행을 앞두면 꼭 미리 예약을 해야하는 곳이죠. 쾌적한 관람은 이탈리아에서 보기 드문 경험입니다.

이 곳은 보르게세 가문이 17세기에 건축한 빌라 보르게세를 이탈리아 정부가 매입해 1903년 미술관으로 개관했습니다. 미술관 중 드물게 창고방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품 260여 점이 설치된 수장고도 예약 방문을 할 수 있는데, 현재는 아쉽게도 창고방의 방문이 중단됐습니다.

 
마리아노 로시의 천정화 <쥬피터에게 환영받는 로물루스>(1775-1778) ⓒ김슬기

 

입장을 하자마자 눈을 비비게 만드는 화려한 천장화가 기다립니다. 마리아노 로시의 <쥬피터에게 환영받는 로물루스>(1775-1778)입니다. 내부에는 빌라를 조성한 교황 바오로 5세의 조카인 쉬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1579-1633)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카라바조, 라파엘로, 티치아노, 지오바니 벨리니의 그림과 베르니니와 카노바의 조각품이 20개의 방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쉬피오네 추기경은 베르니니와 카라바조의 열렬한 후원자였고 덕분에 이곳은 두 사람을 위한 최고의 미술관이 됐죠.

카노바의 <비너스>(1805-1808) ⓒ김슬기

 

1전시실에는 이 미술관의 가장 유명한 조각, 안토니오 카노바의 <비너스>(1805-1808)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유명한 ‘파리의 심판’에서 승리한 비너스가 왼손에 사과를 들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모델은 나폴레옹 황제의 여동생 폴린 보르게세 보나파르트입니다. 1803년 카밀로 보르게세가 결혼을 기념해 조각품을 주문했습니다. 피부와 침대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디테일이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듭니다.

베르니니의 손이 빚어낸 마법 같은 순간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1622-1625) ⓒ김슬기

 

베르니니는 20대에 명성을 얻고 전 유럽의 왕들의 초청을 받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각가입니다. 이곳에는 <페르세포네의 납치>를 비롯해 대표작이 여러 점 있습니다. 2전시실 다비드의 방에는 베르니니가 25세에 만든 <다비드상>(1623-1624)이 기다립니다.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가장 유명한 다비드상과 사뭇 다릅니다. 돌팔매를 던지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근육과 이를 악문 표정이 역동적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도나텔로 등이 만든 정적인 왕의 조각과는 달리 찡그린 얼굴의 다비드는 동적입니다. 다비드가 영웅이 되는 순간을 돌로 조각해내며, 바로크의 시작을 알리는 혁명적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베르니니의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폴론과 다프네>(1622-1625)일겁니다. 아폴론이 자신을 피해 도망가는 다프네를 쫓아가서 막 손이 닿으려는 순간, 다프네는 강의 신인 아버지 페네오스에게 차라리 자신을 월계수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했죠. 베르니니는 여인이 나무로 변해가는 찰나를 포착합니다. 생명이 없는 돌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조각가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나무가 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마법을 부립니다.

살인자, 도망자, 불멸의 천재 화가

이제 카라바조의 작품 6점이 걸려있는 8전시실 실레누스의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12점의 카라바조를 소장해 카라바지스트(Caravaggist)를 위한 최고의 미술관으로 꼽힙니다. 60여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카라바조는 사후에 까마득히 잊혔다 20세기에 엄청난 인기화가로 300년 만에 부활했습니다.

미국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렌슨이 쓴 글이 그를 “미켈란젤로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탈리아 화가는 없었습니다”라고 호명한 덕분입니다.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새 작품의 발굴과 위작 시비도 연례행사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1571년 태어났습니다.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뜻입니다. (실제 출생지는 밀라노였습니다.) 스승 시모네 페테르차노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으나 이후엔 흔적이 모호하다, 1600년 로마에서 혜성처럼 화가로 등장합니다. 전례 없는 실력과 개성있는 표현력으로 극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바로크를 대표하는 거장이 된 카라바조는 거침없이 폭력을 묘사한 화가였습니다. 자신 또한 악당이었죠. 수차례 투옥됐던 법정 기록에는 요리를 두고 웨이터와 싸우고, 집주인을 괴롭히고, 자신을 거부한 여인에 폭력을 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술을 마시면 허다하게 시비가 붙었고 1606년 테니스 경기 도중 말다툼 끝에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와 몰타, 나폴리, 시칠리아를 떠돌았죠. 1610년 살인죄로부터 사면받기 위해 교황이 있는 로마로 향하던 중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38년의 짧은 삶을 마감합니다.

노출 심한 성모...당대에 비난 받은 카라바조
<성모자와 성 안나> ⓒGalleria Borghese

 

가톨릭의 후원을 갈구했던 그는 종교화를 가장 많이 남겼습니다. 덕분의 맨발의 성자를 그린 화가가 됩니다. 더럽고 가난하고 평범한 서민들을 모델로 예수와 성자를 그렸습니다. 주름진 얼굴, 더러운 피부, 병자의 맨발을 그대로 묘사한 겁니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극심하던 당시 가톨릭에는 ‘작은형제회’를 설립해 맨발로 청빈한 삶을 살았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있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가톨릭 개혁을 지지하며 평범하고 남루한 사람들을 그렸던 겁니다. 그에게는 맨발이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천국이었습니다. 카라바조의 전기를 쓴 피에트로 벨로리는 가식과 권위, 위선과 장식이 없는 그의 표현법을 ‘자연주의’라 설명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보죠. 보르게세 미술관에서는 20대 청년기 악마 같은 재능을 가리낌없이 발휘한 <과일 바구니를 든 청년>(1593)부터 <병든 바쿠스>, <성 제롬>, <성모자와 성 안나>, <세례 요한>,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까지 연대기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적 묘사로 당대에 엄청난 비난을 받은 작품이 <성모자와 성안나>입니다. 성자 안나는 노파의 모습이고 성모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금기시 된 누드로 그려진 예수는 어떻구요. 그는 현실의 인물을 모델로 평범한 모습의 성자를 그렸습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Galleria Borghese

 

카라바조의 기법적인 특징은 극도의 명암 대비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입니다. 등장 인물을 단순화하고, 배경을 칠흑 같은 검정으로 칠해 마치 연극 무대의 핀조명 같은 효과를 만듭니다.

이 기법이 극대화된 작품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입니다. 목이 잘린 늙은 골리앗은 비침한 도망자 신세가 된 그의 자화상이었습니다. 만년에 살인죄를 사면받기 위해 교황에게 무릎 꿇었던 카라바조의 번민이 녹아있는 검디검은 자화상입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에는 많은 가설이 있습니다. 사형 선고 직후 1606-1607년 나폴리 시절 그렸다는 설과, 1609-1610년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설입니다. 교황에게 사면을 청하기 위해 로마행 배를 탔을 때 이 작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연구로 인해 나온 설입니다. 현재로서는 그림의 기법상 1606-1607년 설이 유력합니다.

게다가 다비드의 칼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를 통해 교황에게 선물하기 위한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라틴어 약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입니다. “겸손이 교만을 죽인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말이죠.

2유로 동전의 주는 경이로운 체험
카라바조의 마태 3부작. 왼쪽이 <마태의 소명>이다. 동전을 넣으면 조명이 켜진다. ⓒ김슬기

 

드라마 <리플리>에서 리플리는 사기꾼으로 남의 돈과 신분을 훔치기 전에 계시처럼 나폴리 성당에서 <7가지 선행>을 만납니다. 스탕달 신드롬처럼 충격을 받고 그는 살인자 천재 화가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로마에 도착한 뒤, 새로운 신분을 얻은 그는 홀린 듯이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을 찾습니다. 인파에 질식할 것 같은 판테온과 나란히 위치한 성당입니다. 이 공짜 미술관 여행은 놓치시면 안됩니다. (다만 10월 말에는 공사 가림막으로 관람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곳에 걸린 마태 3부작은 리플리에게 운명적인 만남이었죠. 성당의 왼쪽 벽에는 신의 소명을 받고, 성경을 쓰며, 순교하는 마태의 생애가 그려져 있습니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이라 믿는 리플리는 이 그림을 보고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실물로 목격한 3부작은 이 아름답고 거대한 성당을 집어삼킬 것 같은 존재감을 뽐냈습니다. 특히 왼쪽에 걸린 <마태의 소명>은 테네브리즘이 극도로 구현되어 어두운 캔버스 안에서도 창으로 스며드는 빛이 압도적으로 표현됩니다.

이 성당이 재미있는 것은 동전을 넣으면 그림에 조명이 켜지면서 그림을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두운 벽에 숨어있던 그림은 홀연 깨어나며 그림 속 역동적인 인물들에 즉각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장치인 셈이죠. 2유로의 기쁨입니다. 눈치 싸움을 잘하면 선량한 여행자가 대신 동전을 넣어줄 겁니다.

카라바조 미공개 작품에 숨겨진 사연
카라바조 <성 우르술라의 순교>, 1610. ⓒGallerie d’Italia Naples

 

200주년 기념 전시를 연중 행사로 열고 있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지난여름, 작은 전시를 통해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을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 나폴리 미술관에서 대여해온 <성 우르술라의 순교>였습니다. 카라바조의 만년에 관해서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작품이 마지막으로 알려졌습니다.

1610년 5월, 카라바조는 나폴리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을 작업하고 있었고 두 달 후, 그는 의문의 상황에서 사망했습니다. 만년은 대표작을 쏟아냈던 격동의 시기였죠. 그의 전매특허인 연극적 연출과 극적인 빛의 활용이 포함됩니다. 그는 더러운 발과 지저분한 손톱을 가진 실제 모델을 사용했습니다.

20년 만에 런던에 온 이 작품은 지난여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납처럼 창백한 여인이 보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우르술라 부인은 매우 희귀한 표현법을 보여줍니다. 부인의 뒤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의 자화상을 볼 수 있습니다. 죽기 직전 카라바조는 얼굴에 입은 폭행의 상처와 납 중독 등으로 시력이 나빠져 그림이 더 어두워졌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카라바조 <Ecce Homo>(1605-09) ⓒMuseo Nacional del Prado

 

정말, 마지막 첨언이 있습니다. 카라바조를 찾아 여행을 한 번 더 떠나볼 생각입니다. 내년 2월까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초대형 기획전 <Ecce Homo, el Caravaggio perdido>를 통해 미공개 작품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미공개작은 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의 <Ecce Homo>(1605-09)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형을 당하는 예수를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테가 백성들에게 선물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2021년 단돈 1,500 유로에 경매에 출품될 뻔했지만 프라도 미술관과 마술사가들이 검증과 복원을 거쳐 진품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1억 유로를 가뿐하게 넘어갑니다. 정말로 카라바조의 그림은 한 점 한 점마다 다 드라마가 숨겨져 있습니다.

런던에 살면서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를 찾아가 미술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구독’과 지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천재화가 카라바조는 왜 목 잘린 자화상을 그렸을까 [슬기로운 미술여행]

 

천재화가 카라바조는 왜 목 잘린 자화상을 그렸을까 [슬기로운 미술여행] - 매일경제

[슬기로운 미술여행-1]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과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로마 여행에서 놓치면 아쉬운 곳으로는 보르게세 미술관이 있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베르니니와 카라바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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