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clayman 지질학의 고생물학을 전공하는 이가 아니더라도 필트다운인(Piltdown man)은 고고학이나 인류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과학이나 지식의 사기극을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과학적인 연구에서 자료를 잘못 해석하여 바른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은 지질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아예 거짓된 자료를 근거로 속임수로 어떤 결론에 이른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사기극이다. 지질학의 고생물학 분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 과학 연구에 종사하는 소위 과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어떤 연구를 수행하면서 실험의 결과를 임의적으로 조작을 해서 원하는 결론을 얻으려는 시도를 해서 말썽을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물의를 일으킨 줄기세포 관련 논문 조작 사건이 있었다. 과학사적으로도 동서양에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었다. 영국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발명가이기도 했던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1791-1871)는 1830년에 펴낸 『영국 과학의 몰락과 그 원인에 관한 고찰, Reflection on the Decline of Science in England: and on Some of its Causes』이라는 저술에서 학술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기에 관하여 논의하였다.1) 과학의 관찰자가 행하는 부정 수단으로 네 가지, 날조(hoaxing), 위조(forging), 다듬기(trimming) 그리고 요리(cooking)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그런 일을 벌이는 이들은 대체로 과학계에서 명성을 얻기 위해 혹은 과학계에서 발견의 공적을 얻기 위해 타당한 자료를 얻기도 전에 저지르는 부정한 행위로 파악하였다. 위에서 말한 날조나 위조는 설명조차도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다듬기와 요리는 쉽게 이야기하면 실험 결과를 자신의 이론에 맞는 기대치의 범위로 조작하는 것을 말한다. 어찌 됐던 그런 모든 것은 연구 부정이며 윤리 규정에 전적으로 반하는 일들이다. 아마도 실험과학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그런 유혹을 한두 번 느낀 경험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유혹까지야 그리 탓할 일도 아니지만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오래전 배비지가 지적한 부정 수단 중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날조가 필트다운인 사건이다. 그 사기극의 전말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이에 관련된 많은 저술이 있지만 여기서는 하인리히 창클(Heinrich Zankl)과 스티븐 제이굴드(Stephen Jay Gould) 그리고 조지프 와이너(Joseph Sidney Weiner)의 글을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한다.2,3,4) 다음에 소개되는 내용은 이들의 저술에 기반을 둔 것이다. 1912년 12월 18일 영국 서식주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찰스 도슨(Charles Dawson, 1884-1969)과 대영박물관의 지질학 담당이었던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Arthur Smith Woodward, 1864-1944)는 런던지질학회(영국의 지질학회는 지금도 런던지질학회라고 부른다)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특성을 보여주는 두개골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했다.4) 이들은 이 화석에 ‘에오안트로푸스 도소니, Eoanthropus dawsoni’ 란 명명을 하였다(이는 도슨의 첫 인간이라는 의미임). 이것은 곧바로 영국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되었다. 그런 것은 약간의 배경을 알고 있어야 쉽게 파악이 되는 대목이다. 선사시대의 인류 화석이 1856년 뒤셀도르프 근처의 네안데르탈에서 최초의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alensis)의 화석이 발견되었으며, 1868년 프랑스 남서부의 도르도뉴지역 레제지(Les Eyzies)에 있는 크로마뇽 동굴에서 현대의 우리와 가장 가깝게 발전된 크로마뇽인(Cro Magnon Mensch)이 발견되었으며, 1907년에는 독일에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Homo heidelbergensis)가 발견되었다. 그 이후 소위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 즉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빠져 있는 종의 화석을 찾으려는 연구가 한창인 시점이었다. 그리고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이론은 인류는 뇌가 먼저 커졌고 나중에 두발로 서게 되면서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필트다운인(Piltdown man)으로 알려진 도슨과 우드워드가 보고한 그 화석은 그런 학계의 믿음에도 일치하는 원숭이 턱뼈에 인류의 큰 두뇌를 가질 수 있는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 발견된 이 화석은 인류 발생의 시초를 보여준 화석이라는 믿음과 함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족하였다. 창클은 이런 시대적 배경과 함께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영국에서 확립된 점을 감안한다면 대륙을 중심으로 인류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개할 만한 일이다”라고2) 지적하고 있다. 영국의 분위기를 말한 창클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정 부분 올바로 시대적인 배경을 지적한 것으로 여겨진다. 도슨과 우드워드의 학회 발표가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도슨에 의하면 1908년 한 채석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화석의 파편을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파편의 발견 지점은 서식스(Sussex)의 필트다운(Piltdown)이라는 마을 근처의 들판이었다. 도슨은 그의 친구인 화학자 새뮤얼 우드헤드(Samuel A. Woodhead)와 함께 그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1년에 이르러서 이 두 사람은 다른 짙은 색을 띠고 있는 두개골과 하마의 이빨을 발견했다. 이 사실을 우드워드에게 연락하였으며, 우드워드는 이 화석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912년 도슨은 우드워드와 프랑스 예수회 사제이며 고생물학자였던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95)과 함께 다른 증거를 찾아 나섰다. 이 조사 과정에서 도슨은 문제의 아래턱뼈 한 점을 더 발견하였다. 이 아래턱뼈 역시 머리뼈 파편과 마찬가지로 짙은 색을 띠고 있었으며, 그 뼈에는 사람의 아래턱뼈에서는 흔하게 발견되지만 유인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마모된 평행한 두 개의 어금니가 붙어있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유인원 것과 흡사해 보였다. 불행하게도 턱 부분과 턱관절 부위가 없어 아래턱뼈와 두개골과의 관계를 밝혀줄 증거가 손상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슨과 우드워드는 동일한 개체의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우드워드는 자기의 생각대로 이를 복원하여 1912년 런던지질학회에 등장시켰다. 화석의 드러난 특징만으로 보면 두꺼운 머리뼈와 돌출되지 않은 눈썹 뼈는 현대인의 모습과 가까웠으나 아래턱뼈는 턱 끝이 발달하지 않아 유인원의 모습과 비슷하였다. 기존에 발견된 자바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더 큰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현대인의 직계조상을 발견한 것으로 믿었다. 그날 발표를 맡은 도슨은 “서유럽에서 이마가 납작한 네안데르탈인이 널리 퍼지기 전에 이마가 솟은 원시 인류가 최소한 한 종 있었음을 알려준다”고 발표했다. 도슨은 거기에 더해 스미스 우드워드 박사는 네안데르탈인이 이전의 인류가 퇴화한 형태이고 그 후에 멸종했을 것이며, 현대인은 이전의 인류에서 곧바로 내려온 종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 필트다운의 화석이 바로 그 최초의 증거라는 것이다.6) 진화의 연결 고리를 이어주는 실체를 확인한 실로 엄청난 발견이다. 그것도 바로 영국 땅에서 발견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발굴에서 발견한 오래된 포유류의 화석 그리고 가공된 부싯돌 등을 당당하게 함께 제시하였다. 1912년 12월 간행된 《네이처》에는 영국 고생물학 사상 최고의 발견이라는 발표를 하였다. 당시 주요 매체인 런던의 《타임스》 그리고 《뉴욕타임스》도 ‘새로운 인류의 첫 번째 증거’ 그리고 ‘구석기의 머리뼈는 잃어버린 고리, 다윈 이론이 입증되다“ 등의 머리기사로 대서특필했다.6) 그들의 발표에 대한 평가는 반대의 의견도 있었지만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일부 학자들이 제기한 의구심은 당시 유명한 해부학자 그래프턴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1871-1937)와 아서 케이스(Arthur Keith, 1866-1955)가 화석이 진짜라고 하자 논란은 줄어들었다. 1913년 샤르댕은 그 발굴지에서 아래턱의 송곳니를 발견했는데 형태상으로는 유인원의 것과 유사했지만 인간의 이처럼 현저히 마모된 것이었다. 그 후 1915년 도슨은 최초의 화석 발견 장소로부터 불과 3 km 떨어진 지점의 발굴지에서 머리뼈의 조각 두 개와 인간의 이처럼 마모된 유인원형의 이빨 한 개로 이루어진 전과 동일한 조합의 화석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으로 도슨의 발견에 비판적인 의견은 잠잠해지게 되었으며 비판자들은 지지자로 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강력한 비판자였던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마르슬랭 불(Marcellin Boule)은 그 두개골은 진짜라고 하였으며, 미국의 저명한 고생물학자인 헨리 페어필드 오즈번(Henry Fairfield Osborn, 1857-1935) 역시 비판자에서 지지자로 입장을 바꿨다. 그렇게 되자 그 위대한 발굴에 관여한 이들에게 명예가 주어졌다. 왕실로부터 세명이나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사망한 도슨을 위해서는 1916년 필트다운에 기념비도 세워졌다. 이제 필트다운인은 영국에서 발견된 유명한 인류의 조상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3,4) 적어도 그 시절까지는.
그러나 완전범죄로 끝날 듯하던 날조된 허구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필트다운인의 실상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학계의 공인을 받고 30여 년이 지나면서이다. 필트다운인의 뼈가 가짜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1949년 케네스 페이지 오클리(Kenneth Page Oakley, 1911-1981)의 불소 실험 결과이다. 뼈는 퇴적물에 묻혀 있는 시간의 함수로 불소를 흡수하는 성질이 있는 점에 착안하여 시험을 한 결과 이들이 발굴한 필트다운인의 뼈에는 아주 극소량의 불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처음 오클리는 그 뼈가 가짜라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뼈가 비교적 늦은 시점에 묻힌 결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클리는 1953년 와이너(Joseph Sidney Weiner, 1915-1982)와 르 그로스 클라크(Wilfrid Edward Le Gros Clark, 1895-1971)와 공동연구 결과 필트다운인의 화석이 가짜임을 밝히는 명백한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필트다운인의 이에 인공적으로 줄질을 해 간 것을 밝혔으며, 불소의 함량이 하부 플라이스토세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을 하였다. 더 더군다나 뼈가 인공적으로 착색되었으며, 함께 발견된 포유류의 뼈는 진짜 화석이지만 다른 장소에서 가져온 것임을 발견하였다.7) 후일 연대를 측정한 결과 두개골은 약 5만 년 전의 것이었으며, 턱뼈는 훨씬 더 이후의 것임이 밝혀졌다. 턱뼈와 두개골의 연결 여부를 규명해내기 어려웠던 턱뼈의 관절은 일부러 부러트려 없애버렸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 밖의 발굴품 역시 가짜로 다른 화석과 석기는 지중해권에서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다. 온 천하에 그 화석이 날조임이 드러났다. 사실 그게 잘못되었다는 최초의 지적은 아니었다. 킹스칼리지의 해부학자였던 데이비드 워터스톤(David Waterston, 1871-1942)은 도슨과 우드워드가 런던지질학회에서 보고를 한 다음 해 1913년 11월 13일 자로 발간된 ‘네이처’에 반 페이지 기고를 하였다.8) 그는 거기서 두개골은 인간의 것이며, 아래턱뼈는 유인원의 것이라는 아주 정확한 지적을 하였다. 그는 보고의 말미에 “이 아래턱뼈와 머리뼈를 동일 개체로 간주하는 것은 침팬지의 발을 사람의 다리나 넓적다리뼈에 붙이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는 단호한 말로 끝마무리를 하였다. 그 외에도 몇몇의 학자들이 이 의견에 동조하거나 유사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런 올바른 의견이 처음부터 제기되었지만 학계에서 신중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 한 일이었다. 제이 굴드는 이를 영국 학계에서의 기대와 열망, 그리고 편견 때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3)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영국이 인류 발생의 중심지로 기록되고 싶은 국가주의적 욕망에다가 윤리의식은 전적으로 결여된 공명심에만 사로잡힌 일부 과학자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결과이다. 여기서 일부 학자라고 부른 것은 이 사기극이 여러 사람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적어도 쉽게 식별해낼 수 있었던 그런 위조를 당시 학자들이 간과한 것을 나 혼자만의 기준으로 그들도 공범자로 포함시킨 의미이다. 과연 이런 황당한 사기극을 누가 주도했는지가 모든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그에 관련된 수백 편의 연구 논문이나 저술이 발간되었다. 어떤 이는 사기극의 주범을 도슨으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테야르 샤르댕 신부를 도슨의 공모자로 본다. 특히 제이 굴드는 여러 번 그런 의견을 피력하였다.3) 흥미롭게도 샬록 홈스의 저자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도 연계된 것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당시 대영박물관의 동물학부 책임자로 있던 마틴 힌턴(M.A.C. Hinton, 1883-1961)을 지목하는 이도 있다.8) 그리고 이들의 합작품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 정도 되면 필트다운인과 관련 있는 거의 모든 인사가 등장한 결과이며 저마다 그럴듯한 설명이 뒤따르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렇게 주장할 만한 명약관화한 증거가 제시된 것은 없다. 만약 기소가 되어 현대 법정에 서게 된다면 그 정도의 정황증거만으로는 당연히 풀려날 정도에 해당된다. 가장 최근의 일이다. 이런 필트다운인 사기극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학제간 연구로 다방면의 전문가가 모여 수년간에 걸쳐 재검토한 결론이 2016년에 발표되었다.9) 그 결론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위조는 도슨의 방식대로 이루진 것으로 보았다. 여러 개의 시편들은 동일한 일관된 준비과정 즉, 뼈의 착색, 그 지역의 사력을 집어넣기, 이빨의 줄로 다듬어진 모습, 치과의사들이 사용하는 퍼티를 이용한 이빨의 고정을 거친 것 등이 확인되었다. 최초의 발굴지와 두 번째 발굴지에서 발굴된 사람의 뼈는 적어도 두 명 그리고 한 오랑우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두 지역에서 발굴된 이빨의 형태와 DNA 분석 결과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오랑우탄의 것임이 밝혀졌다. 이처럼 위조에 사용된 일관된 방법과 이빨의 동일한 근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위조는 한 사람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의 발굴은 단지 도슨만이 관여하였기 때문에 모든 정황상 증거는 그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이들 연구자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슨에게 위조 화석을 제공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위조에 참여했을 것으로 의심받아온 테야르 드 샤르댕이나 코난 도일과 같은 이들의 참여 가능성은 배제하였다. 이런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누가 이 사기극의 주인공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다만 정황상 모든 의심이 도슨에게 집중되고 있다. 사실 1955년에 이미 와이너는 그의 저서 『필트다운 위조, The Piltdown Forgery』에서 도슨을 범인으로 보는 설명을 설득력 있게 펴낸 바 있다.4) 그는 필트다운인의 역사에서 찰스 도슨을 그 의심스러운 역사와 따로 떼어 놓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제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많은 이들의 열망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필트다운인은 실재하는 “최초의 영국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일개 아마추어 사기꾼에게 농락당한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은 셔머가 지적한 대로 ‘과학은 자기 보정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6) 바로 그런 오류를 밝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연구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바로 과학이라는 그의 말로 이 글을 마감하기로 하자.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문헌들> 1) Babbage, Charles (1830). Reflections on the Decline of Science in England, and on Some of Its Causes. London: B. Fellowes. 2) 하인리히 창클(김현정 역) (2006) 지식의 사기꾼. 시아출판사. 3) 스티븐 제이 굴드(김동광 역) (2016) 판다의 엄지. 사이언스 북스. 4) Weiner, J. S. and Stringer, C. (2004) The Piltdown Forgery: 50th Anniversary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5) Dawson, C. and Woodward, A.S. (1912) On the Discovery of a Palæolithic Human Skull and Mandible in a Flint-bearing Gravel overlying the Wealden (Hastings Beds) at Piltdown, Fletching (Sussex). Quarterly Journal of the Geological Society. 69(1–4): 117–122. 6) Shermer, Michael (2002) The Borderlands of Science: Where Science Meets Nonsence. Oxford University Press. 7) Weiner, W.S., Oakley, K.P. and Le Gros Clark, W.E. (1953) "The Solution of the Piltdown Problem". Bulletin of the British Museum(Natural History), Geology. pp.139-146. 8) Waterston, D. (1913) The Piltdown mandible. Nature, 92; 319. 9) De Groote, I., Flink, L.G., Abbas, R., Bello, S.M., Burgia, L.B., Buck, L.T., Dean, C., Freyne, A., Higham, T., Jones, C.G., Kruzynsky, R., Lister, A., Parfitt, S.A., Skinner, M.M., Shindler, K., and Stringer,, C.B. (2016). "New genetic and morphological evidence suggests that a single hoaxer created 'Piltdown man'". Royal Society Open Science. 3(8). https://doi.org/10.1098/rsos.1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