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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學硏究 - 傾蓋如舊

目標를 向하는 路程은 艱苦하고도 어렵다. 巨大한 努力으로 이 試練을 극克服하고 全勝하면 目的地에 到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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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직하고택(稷下古宅)과 차(茶)
조용헌 동양학자

이미지 출처

내 팔자는 역마살과 문곡성(文曲星)이 겹쳐 있어서 그런지 전국의 기차역을 떠돌면서 글을 쓴다. 배낭에다 풍수를 보는 패철과 노트북, 초콜릿, 양말을 넣고 순천역에서 진주로 가는 무궁화 기차를 탔다.
하동역을 지나 한적한 시골의 북천역에 도착한다. 북천역에서 걸으면 10분 거리에 직하고택이 있다. 직하재(稷下齋) 문헌상(1652~1722)의 고택이다. 앞산이 밥사발을 여러 개 늘어놓은 모양이어서 재물이 모이는 터이다. 이 집은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 토종 목련나무가 장관이다. 높이는 15m나 될까. 거대한 목련에 꽃이 만발하였으니 때 맞춰서 왔구나!
직하재에 가게 된 이유는 문헌상의 7세손인 황남(篁南) 문영빈(文永彬.1891~1961)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독립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위장 사업체였던 백산상회의 실무 책임자가 바로 황남 선생이었다. 경주 최부자집의 문파 최준, 백산 안희제가 자금을 댔고, 그것을 실무적으로 관리하고 보안을 유지하며 상해 임시정부 쪽에 돈을 건네준 역할은 황남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자금의 60%는 백산상회에서 보낸 돈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돈을 관리한 황남 자신도 천석군 부자였음은 물론이다. 남겨진 사진을 보니까 황남은 사람을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相)이다. 사람을 쏘아보는 눈빛, 그리고 입은 야무지게 다문 메기 입이다. 날아오는 화살도 튕겨 낼 듯한 무장 얼굴이다. 황남이 상해 동제(同濟)대학 시절에 여운형, 이극로(월북한 한글학자)와 함께 ‘삼장사(三壯士)’로 꼽힐 정도였다. 이런 관상이니까 일본 경찰로부터 그 비밀을 유지하고 살벌한 압박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고택의 사랑채 한편에 보니까 높이 60cm, 지름 20cm 정도의 원형으로 된 연두색 양철통이 눈에 띈다. “무슨 통이오?” “차를 담아 놓았던 차통입니다. 효당 최범술(1904~1979)이 여기 올 때마다 이 차통에 본인이 덖은 차를 채워 놓곤 하였습니다.” 고택을 지키는 손자 문여황(65)의 답변이다.
일제 때 다솔사(多率寺) 주지이자 당시 유명한 차인(茶人)이었고,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효당이 수시로 이 고택에 드나들었다. 만해 한용운의 만당(卍黨) 거점이자, 당대의 석학 김범부, 김법린의 아지트가 다솔사였다. 경남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직하고택과 십오 리 떨어진 다솔사를 차(茶)가 왕래하면서 독립 자금도 오간 것이었다. 고택 사랑채의 기운이 좋아서 그런지 새벽 4시까지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피곤하지가 않다는 게 신기했다.

[조용헌 살롱]  직하고택(稷下古宅)과 차(茶)

 

[조용헌 살롱] [1489] 직하고택(稷下古宅)과 차(茶)

조용헌 살롱 1489 직하고택稷下古宅과 차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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