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판서宋版書의 특징> 송대宋代에는 조판인쇄술雕版印刷術이 이미 성숙되어 서사書寫와 각인刻印이 모두 상당히 정미精美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특징이 선명하여 후대에 받들어지고 모방되었다.
1. 판식版式 판식으로 보면, 북송北宋의 각본刻本은 대부분 백구白口에 좌우쌍란左右雙欄이거나 사주쌍란四周雙欄이며, 일부 초기의 각본에서는 사주단란四周單欄도 채용되었다. 남송중엽南宋中葉부터 흑구黑口가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건본建本에 많이 나타난다. 판심版心에 왕왕 서명書名, 권차卷次, 페이지, 각공刻工의 성명이 표시되며, 경우에 따라 글자수가 표시되기도 한다. 관각본官刻本의 말권末卷에는 일반적으로 교감인校勘人의 관직명을 새겨넣었으며, 방각본坊刻本에는 서이書耳와 패기牌記가 많이 나타나 있다.
전해오는 송각본宋刻本 가운데에는 글자의 크기를 중시하지 않고 행격行格이 드문드문한 것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남송南宋 절동로浙東路 다염사각茶鹽司刻《주역주소周易注疏》,《상서정의尙書正義》,《주례주소周禮注疏》,《예기정의禮記正義》와 소흥부각紹興府刻《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등은 모두 관식款式이 팔행八行이다. 일부 송각본宋刻本 가운데 행격行格이 비교적 빽빽한 것도 있다. 청대淸代 강표江標가 저술한《송원행격표宋元行格表》는 감정시에 참고할 만하다.
2. 서법의 글자체 송대인宋代人은 서법에 뛰어났으며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의 서체를 숭상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판각板刻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송초기에는 구양순체가 유행하였으며, 후기에는 점차로 안진경체와 유공권체가 유행하였으나, 각지의 각서에는 또 차이가 나타난다. 천본川本에는 안진경체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간가間架가 넓고 자형字形이 풍만하다. 건본建本에는 유공권체가 많이 사용되었고, 필획이 강경剛勁하여 글자가 뼈처럼 단단하다. 절본浙本에는 구양순체가 많이 사용되었고 섬세하면서 수려하며 자형이 약간 수척하다. 강서각본江西刻本에는 유공권체도 사용되었으며 구양순체도 사용되었다.
3. 용지用紙 송대에는 제지술이 발달하여 인쇄용지의 종류가 다양하였지만, 대체로 죽지竹紙와 피지皮紙의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건본建本에는 죽지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색은 황색이면서 얇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면 흑색으로 변할 수도 있다. 절본浙本과 천본川本에는 상수피(뽕나무 껍질)와 저수피(닥나무 껍질)를 원료로 하여 제조한 피지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백색이면서 두텁고 양면이 매끄러우면서 깨끗하였다. 이 밖에 여러 지방에서 마지麻紙를 이용하여 인쇄하기도 하였다. 송대宋代의 각본刻本 가운데 공문서용지公文書用紙의 뒷면을 이용하여 인쇄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북산소집北山小集》은 건도육년乾道六年의 부적簿籍으로 인쇄한 것이며,《호천사芦川詞》는 수량안독收粮案牘으로 인쇄한 것이다. 이러한 '공문지본公文紙本'은 전세량이 비교적 적지만 감별하기는 용이하다.
<원판서元版書의 특징> 8글자로 개괄된다 : 흑구黑口, 조체趙體, 무휘無諱, 다간多簡.
1. 흑구黑口 판심版心의 상하에 인쇄되어 있는 한 줄 흑색黑色의 선線을 가리키며, 한 페이지를 접는 판면版面의 표준이 되어, 장정한 뒤에 서구書口가 밖으로 향하여 흑구黑口를 형성한다. 송대宋代에는 호접장蝴蝶裝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각본은 대부분 백구白口이고, 남송이후南宋以後 포배장包背裝이 유행하여 소흑구小黑口가 비로소 출현하였다. 원초元初 남방의 각본에서도 백구가 일부 존재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원대의 각서에는 흑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흑구黑口에도 조세대소粗細大小의 구분이 존재한다. 관각본官刻本은 대부분 소흑구小黑口로서 서호서원각西湖書院刻《문헌통고文獻通考》, 가흥로유학각嘉興路儒學刻《대대례기大戴禮記》등이 있다. 방각본坊刻本은 대부분 대흑구大黑口이며 근유당각勤有堂刻《고문당률소의古文唐律疏議》와 광근당각廣勤堂刻《신간왕씨맥경新刊王氏脈經》등이 있다. 원대元代 서방書坊의 각서刻書는 송대宋代처럼 정교하지 않아 서구書口의 흑선黑線이 굵어 대흑구大黑口가 유행하는 양식으로 되었다.
2. 조체趙體 조맹부의 서체를 가리킨다. 조맹부는 자字가 자앙子昻이고 호號는 송설松雪이며 본래 송나라의 종실宗室로 서법에 뛰어났으나, 원대元代에 들어와 원세조元世祖에게 중용되어 조서詔書를 써서 마침내 글씨로 유명해졌다. 조맹부체는 비교적 부드러우면서 수려하여 송각본宋刻本의 자체字體처럼 방정方正하고 경직硬直되지는 않으나, 각서할 때의 모사摹寫가 조금 뒤떨어져서 뚜렷하게 연약하고 무력無力하다.
3. 무휘無諱 각서刻書에서 황실이나 종친을 피휘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송각본 및 명청각본에서는 모두 피휘를 중시하여 황제의 이름이 나오면 다른 글자로 고치거나 필획을 줄여서 썼다. 그러나 원대元代 황제皇帝의 이름은 음역音譯한 것이므로 휘자諱字를 중시하지 않았다. 원대의 문화정책은 엄격함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비교적 관대하여 '문자옥文字獄'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휘諱를 범하여 금서禁書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송명청宋明淸의 각본과 비교하여 무휘無諱가 하나의 현저한 특징이다.
4. 다간多簡 각본 가운데 간체자簡體字 및 속자俗字를 많이 사용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서방書坊과 서사書肆의 각서刻書가 속성速成되었으므로, 필획이 비교적 많은 글자를 간화하여 서각書刻에 편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도 원대元代의 각서刻書가 비교적 엉성하다는 점을 반영한다.
이상의 특징을 제외하고, 원대의 각서에는 또 화어미花魚尾와 쌍어미雙魚尾가 자주 나타나며, 목록目錄과 편명篇名에도 화어미花魚尾가 항상 나타난다.
<명판서明版書의 특징> 명대明代 각서刻書의 풍격은 삼기三期로 구분할 수 있다. 1. 명전기明前期(홍무洪武에서 홍치弘治,1368-1505년)는 약 135년간으로 홍무洪武, 건문建文, 영락永樂, 홍희洪熙, 선덕宣德, 정통正統, 천순天順, 성화成化, 홍치弘治를 포괄한다. 자체字體는 여전히 대부분 손으로 써서 판에 올린(수사상판手寫上版) 연체자軟體字로서 주로 조맹부체이고, 판식版式은 흑구黑口에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기본적으로는 원대元代의 유풍을 계승하였다.
2. 명중기明中期(정덕正德에서 융경隆慶,1506-1572년)는 약 60여년간으로 정덕正德, 가정嘉靖, 융경隆慶을 포괄한다. 이 시기에는 복고풍이 점차 성행하여 송본宋本을 번각하는 것이 유행하였으므로, 새로 각한 서적도 송각본宋刻本을 모방하여 판식版式은 대부분 백구白口에 사주쌍변四周雙邊이며, 자체는 구양순체歐陽詢體를 숭상하였으나 그 신운神韻을 얻지는 못하여 매우 경직되고 틀에 박혔으며, 판심版心에 왕왕 글자수와 각공刻工의 성명이 표시되어 있고, 권말卷末이나 서목序目의 뒤에 패기牌記가 새겨져 있다.
섭덕휘葉德輝의《서림여화書林餘話》에서 송대宋代부터 명대明代의 가정연간嘉靖年間에 이르기까지 판식의 변화를 총결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대저 쌍선백구雙線白口는 송판서에 많고 단선흑구單線黑口는 남송말기南宋末期의 마사본麻沙本에 많으며, 원대에 이르러 서로 연용하여 관례로 되었다. 명초明初에 원대의 구제도를 계승하였으므로 성화成化와 홍치연간弘治年間의 각서에서는 흑구黑口를 숭상하였다. 가정연간嘉靖年間에는 송본宋本을 많이 번각하였으므로 백구白口를 숭상하였다." 이 밖에 가정이전嘉靖以前의 각본은 기본적으로 포배장包背裝이며, 가정이후嘉靖以後 점차 선장線裝으로 변화되었다.
3. 명후기明後期(만력萬曆에서 숭정崇禎,1573-1644년)는 만력萬曆, 천계天啓, 숭정崇禎을 포괄한다. 이 시기 각서의 수량이 최대이며, 많은 서방書坊에서는 정성을 기울여 수사상판手寫上版하지 않고 이익을 좇아 급히 제작하였으므로 글자체가 방정方正함에서 길게 변하였고 필획은 가로획이 가볍고 세로획은 무거운 '장체자匠體字'가 되어 후대의 인쇄체와 유사하게 되었다. 인쇄용지로는 죽지竹紙가 많이 사용되어 부서지기 쉬웠으며, 공문서公文書의 뒷면에 인쇄한 것도 있다. 판식版式은 만력萬曆以後 여전히 백구白口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흑구黑口도 일부 나타나며, 판심版心의 어미魚尾에 항상 서명書名을 표기하였다.
명대明代의 각서刻書는 수량이 방대하여 광범위하지만, 전해오는 각본刻本은 대부분 가정嘉靖과 만력이후萬曆以後의 방각본坊刻本이며, 서방書坊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속성하였으므로 대부분 교감校勘이 부정확하고 각인이 엉성하다. 책값을 낮추기 위하여 거친 황마지黃麻紙와 죽지竹紙를 이용하여 서적을 인쇄하여 자체字體가 번지고 뭉개져 모호한 것도 있다. 서방書坊에서 고적古籍을 번각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고의로 책을 분할하거나 내용과 서명을 멋대로 고쳐《대당신어大唐新語》를 《당세설신어唐世說新語》로 고치기도 하였다. 송대宋代 소식蘇軾의 "詩如東野不盡寒,書似西臺差少肉"이라는 구절을 명대인明代人은 '서대西臺'가 이건중李建中의 호號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를 '서시西施'로 고치기까지 하였으며, 이러한 폐단은 이루다 열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비록 명각본明刻本 가운데에도 정품精品이 없지는 않으나, 전체적으로 송원宋元의 각본刻本처럼 정미精美하지 않아 때때로 후세의 조롱을 받았다.
<청판서淸版書의 특징> 청대淸代 각서刻書의 특징은 사기四期로 구분할 수 있다.
1. 강희이전康熙以前의 관각본官刻本은 명대明代의 양식을 계승하여 판면版面이 넓고 글자가 동전처럼 크며 경석영종본經石英鐘本과 유사한 점이 있다. 사각본私刻本도 명말明末의 각본刻本을 모방하여 판식版式이 시원스럽고 자체字體가 방정方正하다.
2. 강희중기이후康熙中期以後 사각私刻이 성행하였으며, 관각과 사각을 막론하고 모두 명인名人을 초빙하거나 친히 수사상판手寫上版였으며, 이러한 자체는 '연체자軟體字'라고 불리웠다. 예를 들면, 백황白潢과 사신행査愼行이 감수한《서강지西江志》는 전체가 모두 손으로 써서 각한 것이다.
3. 건륭乾隆과 가경이후嘉慶以後 고고학이 크기 흥성하여 총서叢書의 편찬과 고적古籍의 번각이 성행하였으며, 판식版式도 고적을 모방하여 백구白口가 다수를 차지하고 흑구黑口는 비교적 적었으며, 자체字體에는 수사하여 각한 연체자軟體字와 송본宋本을 모방한 경체자硬體字의 두 종류가 있다.
그러나 도광이후道光以後 송본을 모방한 자체가 더욱 인쇄체로 기울어, 편평扁平하고 방정方正하며 가로획이 가볍고 세로획이 무거워져서, 명대후기의 송본을 모방한 자체에 비하여 더욱 틀에 박혀 있으며, 글자와 글자, 행과 행의 배열이 매우 빽빽하였다.